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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침의 발자취를 따라가요
[서울역사여행] 국가폭력과 인권탄압의 현장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박물관으로, 민주화운동기념관 해설 관람 후기 본문
이번 여름에 문을 연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언제 갈까 눈치만 보다가 이번 기회에 해설까지 신청해서 야무지게 한 바퀴를 돌고 왔어요. 공간이 크고, 연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하게 보이는 박물관이라 더욱 마음이 갔네요. 거기에 공간 곳곳의 숨은 의미를 더해줄 해설사님의 해설까지! 오늘은 이 모든 것들의 후기를 전달해드리려고 해요.

민주화운동기념관은 국가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그대로 살린 공간입니다. 대공분실이라는 이름 자체는 공산당을 잡는 곳이라는 건데요, 과거에는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공간이 운영되었다고 해요. 심지어 그 안에서도 서로를 경찰로 부르지 않고 ~과장님 ~부장님 처럼 직위로 불렀습니다. 1976년 10월 치안본부가 대공분실 착공에 들어가 1983년에 완공합니다. 1985년 김근태 의장 고문사건으로 실체가 알려졌고,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죠. 1972년부터 북한 간첩은 줄어들었지만, 아까 살펴본대로 완공된 시점은 이미 83년도입니다. 간첩이 없어도 만드는 곳이었다는 것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M2)전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옛 대공분실 건물로 들어가는 구간에는 거대한 대문이 복원되어있었는데요, 문 크기가 성인 키의 두 배쯤 되어서 높이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높이가 높았습니다. 그만큼 큰 문을 열고 닫아야 하니 소리도 엄청나게 컸다고 해요. 마치 탱크 소리 같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감을 느꼈고, 군부대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고문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니. 주변 살마들은 몰랐나 싶을 수 있는데요. 아까 살펴보듯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이름이 붙어있기도 한 데다가 반대편 건물에는 그쪽을 쳐다보지 말라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해요. 면을 맞대고 있는 바로 옆에는 과거 롯데제과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청년주택으로 바뀌었고요. 사람들은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이 곳이 고문실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대공분실은 문도 독특했어요. 들어가는 곳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죠. 문 안쪽으로는 72개의 나선형 계단과 엘레베이터가 있었습니다. 과거 이곳을 지하라고 느끼는 피해자들이 많았다고 해요. 실제로도 매우 춥고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함께 해설 듣는 분들과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이동했어요.
509호는 박종철 고문치사 공간인데 유지, 보존해뒀습니다. 사실 이 공간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는 등 경찰이 관리를 했었어요. 그래서 이 공간도 바꾸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유가족들이 온힘을 다해 막았다고 합니다. 고문공간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해설사님이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어요.



우선 불은 밖에서만 끄고 켤 수 있습니다. 문에 달린 외시경은 안에서 바깥이 아니라,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는 구조였고요. 문 자체가 지그재그로 배치되어있어서 서로 볼 수도 없었다고 해요. 이 건물을 건축한 것은 한국 건축의 대가라고 불리는 김수근이었습니다. 몰랐던 사실이었어요. 평소 <공간>사옥(현 아라리오 갤러리)을 멀리서 지켜보는 걸 즐겼는데, 그 공간의 건축가가 이곳을 설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자해할 수 없는 벽, 탈출 통로가 없는 공간, 희미하게 비치는 빛 등등. 건축을 잘 모르지만 건축가와 이곳을 악용한 당시의 권력이 합쳐져 무수한 피해자를 낳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몰랐더라도 책임이 있고, 알았다면 더욱 큰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 안에는 씨씨티비와 마이크가 모두 설치되어있어서 감시하는 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게다가 벽은 모두 흙움판이었어요. 탕탕 두드리면 소리를 작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도자기는 아니고 특수목재로 만든 벽이에요. 머리를 부딪혀도 자해가 불가능한 소재죠. 공조기(냉난방기)도 마련되어있었는데, 이후 고문과 관련된 재판에서 활용되었다고 합니다. 인권이 보장된 상태에서 조사가 진행되었다고요. 박종철이 머물렀던 509호는 3평 남짓이었던 반면 515호는 훨씬 크기가 컸습니다. 전기고문도구가 필요했거든요. 83년 김근태 의장에 의해 공간이 밝혀질 때 고문을 받았던 장소로 추정되었다고 합니다. 김근태 의장은 평생 고문 휴우증에 시달려 나중에는 활자를 전혀 읽지 못하게 되었고, 치과 진료를 위해 누울 수 없어서 진료조차 불가능했다고 해요.


4층에는 박종철 사망진단서 등 고문사건부터 이어지는 대학생 집회의 연혁, 이후 간첩 만들기 과정에 대한 자료가 마련되어 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건 이한열 피격 이후 200만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집회의 사진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가 참여했던 항쟁까지는 사실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다고 해요. 여고생들은 자신의 점심을 시위대에게 전달하는가하면, 일반 시민들은 최루탄에 맞은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으라고 휴지를 던져줬다고 합니다. 이한열 열사의 사망 이후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투쟁했고, 결국 6.29 항복 선언을 쟁취합니다. 물론 여기서 끝은 아니었습니다. 국가기관들은 명칭만 교묘하게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놀랐던 점은 남산 유스호스텔이 과거 중앙정보부 자리였다는 것이었어요. 자주 방문하던 곳이었는데, 그런 역사가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원래 해설사님의 해설은 M2에서 종료되는데, 민주화운동기념관 본관인 M1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주셨어요. 약 1시간 정도 M1에서 걸렸다면 나머지 공간에서 30분 정도 설명을 더 해주셨습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고 느낄 만큼 실감나고 생생한 설명 시간이었어요.


M1공간은 대공분실에 비해 낮았습니다. 주변 사방에 다 높은 건물인데도요. 하지만 건물을 지을 때 '역사를 마주하는 낮은 시선'이라는 의의를 담아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민주화운동사,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주체들, 노래와 시, 마무리 코스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6.10 민주항쟁 이외에도 2.28 대구의거, 4.19혁명, 부마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여러 민주화운동을 더 자세하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역사를 기억하는 낮은 시선이 건축에서 느껴져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건축물이 지닌 아픔을 또 건축물로 승화시켜낸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어떤 시간을 마주하고 온 것인지, 돌아와서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전시였습니다.
